천년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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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선생의 생애와 업적

천년의 꿈

  • 시습은 1483년, 49세 때 관동으로 2차 방랑길을 떠났다. 춘천, 강릉, 양양 등을 거치며 숱한 시를 남겼다. '동봉 여섯 노래'도 이때 남긴 시이다. 여섯째 노래는 그가 말년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활시위 당겨 사악한 별 쏘려 했더니
    옥황상제 사는 별이 하늘 가운데 있네.
    긴 칼 뽑아 여우 베려 했더니
    백호가 산모퉁이 지키고 섰네.
    북받치는 설움 풀지 못하고
    휘이 하고 휘파람 불지만 곁에 아무도 없네
    씩씩한 뜻은 무너지고 괜시리 수염만 쓸어보네.'

  • 번 세상에 뜻을 펼쳐보려 했으나 방해꾼들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홀로 쓸쓸히 말년을 보내는 심경을 담은 시다. 김시습의 일생을 훑어보면 그는 이른바 '비주류'로서 살고자 했던 것만은 아니다. 그가 꿈꾸었던 왕도 정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했던 것 같기도 하다. 세조가 물러난 뒤 열린 새로운 세상에서 그는 한때 현실 정치에 자신이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무위에 그쳤다. 그가 유교건 불교건 현실적인 측면에 주목했고 늘 노동을 중시하며 스스로 노동에 힘썼던 것도 따지고 보면 현실주의자였던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 1 491년 봄, 서울 중흥사에 온 김시습은 김일손, 남효온 등과 4박 5일간 머물며 도봉산 북한산 등을 유람하고 다시 관동으로 갔다. 그런 뒤 부여 무량사로 걸음을 옮겨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봄비 줄기차게 흩뿌리는 삼월
    선방에서 병든 몸을 일으켜 앉는다.
    그대에게 달마가 서쪽에서 온 까닭을 묻고 싶다만
    다른 중들이 거양할까 두렵군.'

  • 월당 김시습이 1493년(성종 24년) 봄에 쓴 '무량사에 병들어 누워(無量寺臥病)'라는 제목의 시다. 김시습은 이 시를 쓴 얼마 뒤 무량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조선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김시습은 이렇게 시대를 마감했다.
  • 58세 되던 1492년, 관동을 떠돌던 김시습이 왜 무량사로 갔는지는 지금도 미스터리다. 분명한 것은 그가 이곳에서 다른 세상으로 갔고 시신을 화장했으며 승탑(부도·충남유형문화재 25호)과 그가 스스로 그렸다는 자화상(보물 제1497호, 불교중앙박물관 소장)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무량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매월당의 정신과 사상을 현실에서 느끼고 체화할 수 있는 훈련장이자 역사의 무대이다.
  • 종 때 이자가 <매월당집서>를 썼다. 윤춘년은 <매월당 선생전>을 펴냈다. 선조 임금은 그의 문집 <매월당집>을 간행했다. 매월당집에 수록된 그의 시는 2,200여 수에 달한다. 율곡 이이가 쓴 '김시습전'도 이 안에 들어 있다. 1518년에 편찬한 <속동문선>에는 그의 시가 49제 68수나 실려 있다. 조선 전기의 문인 가운데 <속동문선>에 50여 수 이상의 시가 실려 있는 사람은 서거정과 김종직 외에 김시습뿐이다. 정조는 그를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청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시습의 저서로는 <매월당집>, 단편소설집인 <금오신화>, <탕유관서록> 등 4유록 6권, 시집 9권, 사부 1권, 정론, 철학논문 및 기타 산문들로 엮은 문집 3권 등 모두 19권 5책이 전해지고 있다. 그가 지은 시는 수만 편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역대연기> <사방지> <기산기지>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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