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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흥사를 나와 떠돌던 김시습은 강원도 철원 복계산 자락의 사곡촌으로 갔다. 지금의 철원군 근남면 잠곡리이다. 세조 정권이 싫어 서울을 떠난 전 병조판서 박계손과 그의 부친 박도 등 영해 박씨 일가 일곱 명이 이곳에 은거하고 있었다. 이들 가문의 시조는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이다. 박씨 일가 외에는 세조가 예조참판에 임명했으나 이를 거부한 조상치가 이곳에 있었다. 김시습은 이들과 함께 이곳에 은거하면서 패도의 시대를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훗날 이 부근에는 이들 아홉 사람을 기리는 사당인 구은사가 세워졌다. 김시습이 머물던 곳은 현재 매월대, 매월폭포가 있다. 매월대는 김시습이 바둑을 두기도 하고 사색에 잠겼던 바위이다. 매월폭포는 김시습이 시름을 달래던 폭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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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은 1456년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준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사실은 이긍익이 지은 <연려실기술>에 나와 있다. 이긍익은 "김시습이 박팽년 유응부 성삼문 성승 등 다섯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고 작은 돌로 묘표를 대신했다고 한다"라고 썼다. 사곡촌에 머물던 김시습은 사육신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상경한 것 같다. 1457년 10월 단종은 영월에서 목이 졸려 죽는다. 김시습에게는 울분과 통한의 나날이었다. 이듬해인 1458년 봄 24세의 김시습은 공주 동학사로 갔다. 동학사에는 삼은각이 있다.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를 기리는 사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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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은 이곳에서 단종의 제사를 지냈다. 동학사의 원래 이름은 상원사인데 고려태조 왕건이 재위 4년에 중창한 것으로 알려져 유명해졌다. 동학사는 과거부터 체제 비판적인 인물을 기리는 일종의 성지 같은 곳이었다. 신라시대 대승관 유차달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936년 신라가 망한 후 나라를 건국한 박혁거세와 눌지왕 때의 충신인 박제상의 초혼제를 동학사에서 지냈다. 그는 절을 확장하면서 절 이름을 상원사에서 동학사로 바꿨다. 이후 고려 때 충신인 야은 길재가 조선 태조 3년에 고려 태조와 공민왕의 초혼제 및 정몽주의 제사를 동학사에서 지냈다. 1399년에는 고려조의 유신인 유방택이라는 사람이 정몽주, 이색, 길재의 초혼제를 지냈다. 1400년 공주목사인 이정간이 동학사에 삼은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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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은 이후 승려 차림으로 관서 탕유에 나서 임진강을 건너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로, 이후 평양으로 갔다. 영변, 묘향산 등을 돌아보았다. 김시습은 1458년 가을 평양 부근의 초막에 머물면서 관서 지방을 여행하면서 지었던 시들을 묶어 <유관서록>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후 양평 용문사, 여주 신륵사, 원주 동화사, 오대산 월정사, 경포대, 대관령··· 등 관동 지방을 유람한 기록을 1460년 9월 <유관동록>으로 정리했다. 호서 지역을 유람한 뒤인 1463년 가을에는 <유호남록>을 지었다. 그야말로 삼천리 방방곡곡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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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 되던 1463년 봄 그는 경주 금오산 용장사로 간다. 이곳에서 그는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다. 용장사에서의 느낌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용장사 경실에 거처하면서 느낌이 있어서'라는 시다.
용장산은 깊고 으슥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없네.
가랑비는 시냇가 대숲으로 옮아가고
살랑 부는 바람은 들판 매화를 보호하지.
작은 창 아래 사슴과 함께 잠들고
마른나무 의자에 먼지와 함께 앉았다.
어느새 처마 아래
뜨락 꽃은 졌다가 또 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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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은 금오산에 머물면서 매화의 기품과 매화를 찾아나서는 즐거움을 노래한 시들을 14수나 지었다. 김시습이 매화를 자신의 상징물로서 노래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였다. 매화는 청사(淸士), 은일, 은둔의 상징이다. 그는 매화를 보면서 그 정결한 정신을 사랑하고 세간의 명리를 좇지 않겠다는 뜻을 다잡았다. 지금 많이 알려져 있는 '매월당'은 그가 경주에 머물고 있던 시절의 당호이다. 그가 남긴 시문에 '매월당'이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훗날 윤춘년이 쓴 '매월당집'에서부터 '매월당'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해 일반화 되었다. 매월당은 설잠이라는 법명 외에 동봉, 청한자, 오세, 벽산청은, 췌세옹 등 호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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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에 머물다 1465년 원각사 낙성회에 참석했던 김시습은 이후 10년 가까이 수락산에 은거한다. 지금의 남양주시 내원암 근처이다. 김시습은 '폭천정사'를 짓고 스스로 노동하며 불교와 도교에 대해 공부한다. 김시습은 성종 임금이 즉위하면서 새로운 인물을 널리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관직에 나아갈 생각을 갖고 상경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시대에 자신의 역할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기대만큼 변하지 않았고 천거해주는 사람도 없었기에 그의 은거는 계속된다. 이 시절 그는 당시의 정치 구조에서 소외되어 있으면서 자유를 추구했던 유생 남효온, 종실인 이정은, 아전 출신 홍유손 등과 두루 교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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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세 되던 1481년 봄 김시습은 돌연 머리를 기르고 환속했다. '···어리석고 못난 소자가 가문을 이어야 할 텐데, 이단에 깊이 빠졌다가 말로에 가까스로 뉘우쳤습니다···"라는 제문을 지어 부친과 조부의 제사를 지냈다. 이때 김시습은 안씨의 딸을 맞아 두 번째로 결혼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김시습은 왜 갑자기 환속해 다시 결혼을 한 것일까. 당시 유교적인 분위기에서 그 또한 후사에 대한 고민이 있었던 듯하다. 간혹 병으로 누워 있었던 것에서 보듯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결혼을 재촉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첫 번째 결혼처럼 두 번째 결혼도 오래가지 못했고 후사도 없었다.